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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긁적이기

예전 고대 페르시아와 고구려 군사력에 대해 리플로 썼던 글

by 시간의지배자 2007. 10. 19.
예전(2004-03-19) 사커월드 게시판에 우연히 올라온 고구려와 고대 페르시아의 군사력의 비교에 대한 글이 올라왔던것을 리플로 달았던 글을 다시금 같은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우연히 사커월드 게시판(구 회게1)에 아직 이글이 남아있어 예전 기억이 나 올립니다. 지금보니 제 주장 수정할것도 제법되네요.

음냐~~ 그냥 재미로 보시기를... 이어지는 내용은 당시 이글에 달렸던 여러분들의 리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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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아래 이란과 한국의 경기가 고대 페르시아와 고구려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리플로 달은 글입니다. 축구랑 상관은 없을지라도 쓰다보니 리플로 남기에는 너무 아까워서요. -_-;;

고구려 중장기병부터 고려의 기병, 그리고 현재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이야기까지 흘러나와버렸네요. 그냥 재미로 보세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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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시대별로 주력병력이 좀 다른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초기에는 보병위주의 군대이다 점점 중장기병으로 넘어가죠.(이때가 고구려 최전성기인 광개토대왕, 장수왕시절이죠.)

광 개토대왕시절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그야말로 무적이었습니다. 예전 어떤 논문에서 봤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징기스칸의 기병전술의 원류가 바로 고구려광개토대왕의 전술 그대로라더군요. 즉, 그 이전부터 기병전술등은 있었습니다만 사실상 북방민족의 모든 기병전술을 통합해 최종판으로 내어놓은 버전이 고구려 광개토왕의 기병전술이라는거죠. 그 이후의 북방민족의 기병전술은 역사와 시대상황에 때라 조금씩 변하기는 했습니다만 그 기본 전술은 광개토대왕이후로 거의 변함이 없다고 하더군요. 가장 정통적으로 계승한것이 징기스칸이라고 하면서 조목조목 예를 들어 설명했었는데 당시에는 별 흥미가 없어 대충 읽었던 점이 아쉽군요.

일반적으로 같은 능력의 지휘관과 병사들의 기량일경우 보병과 기병의 전력은 1:7정도로 알려져있습니다. 즉, 기병 하나가 보병 7명을 상대할수 있다는 거지요. 더군다나 기록과 발굴에 의한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말조차도 빈틈없이 강철로 된 마구를 장착할정도로 그야말로 철벽 그 자체였습니다. 일반 기병도 아닌 이런 중장기병이라면 그 전력차는 그보다도 더 차이가 났을겁니다. 그야말로 당시 보병들에게는 지금의 탱크에 못지않은 위압감을 주었을만한 어마어마한 군대였죠. 실제로 총이 개발되고 실전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인 근대부터 20세기 초조차도 세계최고의 지상군은 머스킷병이나 소총병이 아닌 영국 창기병이었던 것에서 드러나는것처럼 1차대전에 탱크가 출현하기 전까지 수천년간 지상최강의 부대는 각나라의 정예기병이었습니다.

고구려이후 일어난 각종 북방민족들인 요, 금, 몽골, 청나라...모두 기병중심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동아시아를 제패했던 것에서 미뤄볼수 있듯이 기병을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최강의 군대를 가진 나라가 되느냐 마느냐 했던거죠. 실제로 몽골이 전세계를 휩쓸당시 주력병력은 겨우 2~3만의 기병이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 뒤에는 보병도 있고 지원군도 있고 했지만 항상 전쟁의 중심에서 주력군은 겨우 저 소수의 기병이었던거죠.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전까지는 동아시아의 군웅들중 하나였지만 기병전술을 완전히 정비하고 정복에 나서기 시작한이후 동북아시아의 절대패자가 되었지요. 그만큼 실제 운용을 잘하는 지휘관만 만난다면 무적이라고 할수있을만한 군대가 고대의 기병이었습니다.

물론 고구려도 후대에는 성을 튼튼히 쌓고 강력한 수성전을 펼치는 보병위주로 다시 변하갑니다. 정복이 아닌 수성일때는 당연히 기병보다는 보병이 유리하죠. 또 그 수성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보급부대까지 포함 약 300~400만의 군대를 이끌고 왔던 수양제가 요동성 하나를 넘지못해 30만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다른방향으로 고구려를 치려한것이나 당태종의 안시성 싸움에서도 보듯이 고구려는 강력한 수성능력도 있는 나라입니다.

즉, 지킬때는 '치'라는 특수한 축성기법을 바탕으로 강력한 수성전을 펼치고 공격할때는 완전무장의 중장기병을 동원하여 적을 초토화시키는 전술을 고구려는 자유자재로 구사할수 있었기에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되었던것이죠. 이런 점이 또한 기마중심의 병력을 운용했던 다른 북방민족과 차이점이기도 하구요.(고구려의 독특하고 강력한 축성법때문에 중국에는 아직도 몇십년정도밖에 안되어보이는듯한 고구려 산성들이 수두룩하게 있습니다. 각종 지진과 세월의 영향에도 끄덕없이 버텨온거죠.)

다른 북방민족이 유목민의 생활환경을 기반으로 기병을 운용했다면 고구려는 반농반목의 전통이 있어 기병과 보병 모두를 잘 사용했다는 차이점이 있지요. 실제로 중장기병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패자로 올라선 광개토대왕시절에도 성을 공략하거나 평지가 아닐때의 전투는 보병중심의 전투로 자유자재로 바뀌는 광개토대왕의 전술을 보면 고구려는 이미 고구려 초기부터 부여등에서 흘러들어온 기마중심의 전술과 만주, 한반도를 아우르는 보병전술에 모두 능통했다는것을 이해할수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라면 솔직히 페르시아 전성기보다는 고구려가 더욱 강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페르시아는 솔직히 강력한 보병중심의 국가였지 수성이나 기병등에서는 거의 알려진게 없더군요. 다만...시대가 다른데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요.

또 하나 기병을 이야기하면서 아쉬운것은 고려의 윤관장군의 대원정의 실패입니다. 당시 고려는 강력한 10만명정도의 기마군을 완성하여 만주와 연해주를 정벌하였죠.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어느정도까지 원정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에 따라 만주부터 연해주 또는 내몽고지방까지 정벌을 하였다는 사람들이 있지요. 다 떠나서 만주지방만이라도 확실하게 그때 제패를 하였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또다시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지키기 어렵다고 다시 여진족들에 땅을 돌려주었다고 하였는데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징기스칸이 세계를 정복할 당시 주력군이 겨우 2~3만의 기병이었고 그걸로 세계를 정복하였습니다. 그보다 훨씬 작은 만주정도를 지키기 어렵다고 하는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특히나 고려는 징기스칸 당시 몽골보다는 훨씬 인구수나 문화, 경제적인 면에서 강국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대대로 북방민족들은 흩어져 살다가도 강력한 세력이 나와 초원을 평정하면 충성을 맹세하며 그 세력에게 귀속하였습니다. 고구려나 발해시대에서도 모두 마찬가지였고 그후 몽골의 징기스칸이나 요나라, 금나라, 후금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고려가 발해이후 잃어버린 우리의 옛땅인 만주를 찾을 마음만 있어서 강력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면 수천년간 그들에게 이어내려온 습성처럼 고려에 귀속되었을 것입니다. 즉, 고려는 국호에서 말한대로 제 2의 고구려가 다시금 될수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문치에만 빠진 당시의 조정과 고려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송나라의 방해로 다시금 동북아시의 패자가 될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만 겁니다. 당시 고려의 군사력이 상당한 강국이었다는 것은 송나라의 각종 기록에서도 들어납니다.

당시 기록에 보면 후일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에 대한 고려의 군사적 자신감을 여기저기서 볼수 있습니다.기록에는 당시 한족들인 송나라 스스로 고려의 군사력이 송나라를 능가하고 있음을 여기저기서 보여주죠. 또 금나라조차도 고려보다 강대한 세력을 갖추게는 되었지만 요나라등과는 달리 함부로 고려를 침공하거나 하지 못했습니다. 고려는 건국후 몽골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몽골조차도 무려 7번을 쳐들어와서 고려의 무릎을 꿇리게되는데 이는 몽골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할수 있지요. 당시 몽골이 서아시의 최강자인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킬때도 단 2번의 침공으로 멸망시킵니다. 그나마 몽골이 첫번째 침공때 패배한것이 징기스칸의 몽골군 최초의 패배일정도로 당시 몽골은 말그대로 천하무적의 군대였습니다. 그런 몽골이 조그만 한반도에 위치한 고려에게 7번이나 쳐들어왔다는것은 몽골로서도 생각하기 어려울정도로 끈질긴 군사력을 가진 고려였지요. 그나마 고려는 또 몽골에게 패해서 무릎을 꿇은게 아닌 수십년간 쳐들어오는게 지겨워서 스스로 나와 항복한 몽골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 항복이었지요.

그런 고려였기에 당시에 몽골에게 대항한 나라는 모두 멸망시켰음에도 고려는 국권을 살려둘수 밖에 없었지요. 그나마 부마국 대우를 해주고(물론 침탈을 심했지만 몽골의 군대에 대항했던 사람들은 씨를 말려버리는 당시 몽골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지요.) 고려의 왕을 몽골황제의 형제국취급을 해줄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것이 고려였습니다.(물론 패망 가까이 되서는 왜구의 대규모 침략도 있었습니다만 원래 패망왕조 말년은 다 그런거니까요.)

디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한 기회가 있었음에도 망설였던 고려는 그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후로 다시는 고토를 수복할 생각을 꿈꾸지 못하게 되고...결국 만주는 다시는 우리 품에 돌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발해이후 만주는 고려인이 누구나가 인정하는 고려가 거란족인 요나라에게서 수복해야할 영토였습니다. 발해멸망후 시기가 얼마되지 않았었고 실제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중국 한족은 만주를 확고히 자기들의 영토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동북공정을 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그 어쩡쩡한 만주의 실제 정통성을 한국인들에게 뺏어와 영토문제를 완벽하게 매듭지으려는 중국정부의 자세가 오히려 지금까지 중국정부가 만주를 확실하게 자국 영토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반증이랄수도 있겠네요.(중국 한족들은 만주를 북방민족 또는 여진,만주족의 영토라고 생각했지 자국의 영토라고 최근까지 생각하지 못했다는 거지요. 물론 청나라의 영토였지만 한족들은 청나라를 현 중국 영토로 만들어준 것때문에 자국의 역사에 편입했을뿐 감정적으로는 청나라는 중국의 역사라고 하기 어려운거죠. 즉, 청나라의 영토는 계승하고 싶은데 청나라의 정통성은 계승하기 어렵다는게 그들의 문제이죠. 즉, 중국의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때문에 그런겁니다. 정통성을 계승안하자니 지금 현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가야하고 그건 싫으니 표면상으로는 청나라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한거죠. 만주에 대한 고구려 문제도 마찬가지인거죠.)

그냥...생각보다 고구려의 군사력은 강대했다는 예를 설명하고자 했을뿐인데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역사이야기하면 아쉬움이 너무 많아서...죄송.... ^^;;

홍승범
정말 다시는 만주를 차지할 순 없는건가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는데.............................하여튼 모르죠!! ㅎㅎ
2004-03-19
16:46:21
211.184.55.198



R9
만주족들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
일단 그들을 핏줄로 인정을 하고 난 이후 만주를 노리던지 해야하지 않을까요?
2004-03-19
16:47:11
221.146.196.251



김승규
만 주족들이 살아있기는 하지만 그 수는 100만명도 안되는것으로 압니다. 그나마 지금 중국정부의 동화정책으로 50년 안에 대부분이 사라질것이라고 한다는군요. 동아시아에서 이제 고구려의 후예라고 할만한 자처할 민족은 이제 우리밖에 없는것이죠.

저 동북공정이야기는 쓰려고 한게 아닌데...기병 이야기하다 보니...흥분해서 나와버렸다는...-_-;; 정말 이제는 글쓸때 아무생각없이 쓰면 안될것 같네요. 동북공정 이야기 쓸줄 알았으면 아주 상세히 쓸 자료 많은데 온라인으로 쓰다보니..에고...저도 글재주는 없나봐요...
2004-03-19
16:50:26
220.126.125.193



개떵이
흠 그런데요, 몽고를 막아낸 게 아니라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에
항복한다고 하고 나서 항복 안 하는 식으로 시간 끈 거 아닌가요?
몽골은 일본 원정에서도 패하지 않았던가요.. 태풍이라지만
수군이 약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강화도 천도로 시간 끈걸로...흠
2004-03-19
17:09:20
211.201.39.74



여경래
움.. 제가 알기로 몽골기병은 중장기병이 아닌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가능한한 가벼운 복장과 장비로 유명했던..특히 그중에서도 히트앤드런 작전이 뛰어났던 궁기병들이 몽골기병의 전술적 핵심이었던거로 알고 있습니다. 중장기병의 대명사는 바로 유럽의 기사들이죠..ㅡ.ㅡ;;.폴란드에서 있었던 서유럽기사들(중장기병)과 몽골기병(경기병)과의 전투에서 몽골기병들이 서유럽기사들을 무참히 짓밟아버리죠...정확한 전술적인 배경까지는 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겠습니다만...결국 스피드와 가술이 힘을 압도한 결과를 낸 전투죠...거기다 기병의 전성기는 중세 유럽을 거치면서....15-16세기 정도만 되도 상당히 전술적인 역할이 축소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총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스위스 창병을 위시한 창의 사용을 통한 효과적인 기병 제압 전술등이 개발되었구요.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지상 최강의 부대는 기마대였다는 것에는 토를 달지는 않겠습니다만, 총의 등장으로 사실상 기마대 위주의 전술은 끝나버렸죠.....

움...어쨌든 얘기가 옆으로 빠져버렸는뎅...고구려 기병이 중기마병이었다면 몽골기마병들과는 차이가 있는거로 보이는데요...^^;
2004-03-19
17:11:30
203.252.62.52



여경래
움.. 그리고 글 전체적인 입장이나 시각이 객관적이지 못하게 보인다는....팔이 너무 안으로 굽었달까...이런 느낌이 드네요...... 이 글 보시는 분들 이 글의 내용을 100%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는 마시길 바란다는...글 쓴분에게는 좀 무례한 리플이긴 하지만, 어쩔수 없는 리플이라는....ㅡ.ㅡ 중국의 동북공정도 진실이 아니지만 이글도...거짓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진실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여지네요....한마디로 좀 허풍이 심하달까....흠흠 어쨌든 글 읽는 분들 적당히 가감해서 받아들이시길...@@2004-03-19
17:18:22
203.252.62.52



김승규
개 떵이님 // 항복한다고 하다 항복 안한게 아니구요. 절대 항복할수 없다고 하면서 강화도로 들어가서 수십년간 투쟁하다 최씨무신정권이 끝나면서 문신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되어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항복한겁니다. 그에 반발한 무신세력들이 삼별초의 항전을 한것이구요.

여갱래님 // 아, 몽골기병이 중장기병이었다는 뜻은 아니구요. 몽골 기병의 전술이 고구려기병과 같았다는 뜻입니다. 가벼운 복장과 장비로 몽골기병이 득세했다면 고구려기병은 중장기병임에도 히트앤드런 작전과 몽골기병의 특징이었던 말을 여러필 끌고 다니면서 말의 피로를 줄이는 방법등이 그 이전 북방민족에게서는 없던 고구려에서 발생한 기병전술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몽골기병등이 서유럽의 중장기병들을 격파한것은 기동력도 있지만 우수한 활로 인해서라고 하더군요. 중장기병이라고 해도 고구려의 중장기병은 유럽식 중장기병이랑 많이 다르다고 하네요. 뜻밖에도 유럽의 중장기병은 몽골의 활에 맥을 못추고 패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단순하게 경기병과 중장기병이 붙는다면 경기병이 백이면 백 패하게 되죠.

그리고 기병의 전성기가 중세유럽이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그건 기병이 아닌 기사의 전성기이지요. 실제로 18~19세기의 나폴레옹 군대 최강의 군대였던 황제친위군은 기병이었습니다. 단순하게 총이 등장하기 이전 스위스 창병등이 잠시 기병제압전술이 있었지만 오히려 총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오히려 다시 기병이 강세가 됩니다.

즉, 전투등에서 스피드를 이용해 일차적으로 창으로 적 군대의 중심을 타격하고 뚫고 지나간후 적의 중심부가 뚫리면 말머리를 돌려 창을 버리고 장전해놓은 총으로 혼란에 빠진 적을 괴멸하는것이 19~20세기 세계 최강의 군대라는 영국 창기병의 일반적인 전술이었습니다. 그때 당시의 총기는 오발과 조준등의 문제가 있어서 오히려 대단위의 총기병이 일제 사격을 하는것을 제외하고는 이 전술을 막을 방법이 없었지요. 실제로 영국 창기병 천기정도가 만명정도의 보병등을 격파한 예가 19세기 말에도 있었습니다.

즉,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세계전사등에서도 영국창기병은 최강의 군대로 공공연하게 이야기를 하고있지요.

그 리고 여경래님...단순하게 객관적이지 못하니 믿지말라고 하시는데요. 그건 님의 생각이시구요. 동북공정도 사실이 아니고 이글도 사실이 아니라는 양비론적인 시각보다는 어떠어떠한 이유에서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글이라면 좋겠습니다. 단순하게 자신의 시각에서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믿지말라는 하는 자세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2004-03-19
17:31:41
220.126.125.193



김승규
좀 더 몽골기병이 유럽연합군을 격파한 무기인 활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자면 우리나라의 국궁과 비슷한 '만구다이'(Mangudi)때문입니다. 서양인들의 가장 강력한 갑주라는 풀풀레이트 메일도 가볍게 뚫어버릴정도로 막강한 무기입니다. 이 무기로 몽골기병은 독일기사단을 포함한 유럽연합군을 괴멸시켜버리죠.

유럽인들 입장에서는 미치는 노릇이죠. 멀리서 번개처럼 달려와서 활쏘고는 뒤로 도망가면 아군은 숱하게 갑옷에 활을 맞고 죽어있고 가벼고 스피드가 빠른 몽골기병등은 벌써 저만큼 도망가있으니 중장기병인 그들은 쫒아가기고 어렵고...

실제 만구다이 같은 계열의 국궁은 서양에서는 근세까지 개발을 못하고 동북아시아서만 개발을 하는 편이었으니까요. 자세한 설명은 아래 링크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http://skywind.nayou.net/arms/bow.htm


자, 저는 제 의견을 위해 근거등을 내 놓았습니다만 여경래님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객관적이지 않다느니 한쪽으로 취우쳤다느니 말씀하시네요. 그런 말씀보다 근거를 내놓으시죠. 계속 근거 요청하시면 다른 자료도 계속 올릴수도 있습니다만...-_-;;

혹시...화교분이신가요? -_-;;(죄송합니다만...-_-)
2004-03-19
17:52:12
220.126.125.193



김승규
위의 타겟이 이상하게 나와버리네요..아무리 수정해도 안된다는...분명히 지우고 올리는데도...-_-;;2004-03-19
17:53:45
220.126.125.193



김승규
참 고로 원래 윗글은 단순하게 몇줄 리플을 달려고 하다보니 문맥상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부분들도 있습니다만 내용들을 역사기록, 학자결과논문, 다큐멘터리, 각종 전쟁전사등을 모두 종합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단순하게 제 의견들이 아니라 여러 의견들을 하나로 모았을뿐이고 원하신다면 인터넷에 있는 자료라면 링크주소를 알려드릴수도 있습니다.

여경래님같은 분의 말씀을 예를 들면 마치 제가 괴테의 어떤 철학에 대해서 주장하면 옆에서 위스키한잔 들고서 "괴테가 그런 말도 했었나?"라고 사람들의 주위를 돌린뒤 "계속해보쇼...그런말도 했을지 모르지"라는 식이십니다.

즉, 제가 주장하는것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저를 거짓말장이로 몰아가려고 흔들기를 하시는거죠. 반박하실것이 있다면 반박하신다면 제가 틀렸다면 수긍하고 인정하지만 단순하게 객관적이지 않다는거나 님의 마음에 들지않는다고 믿지말라고 하는것은 이번 토론에 나온 전여옥의 미숙아의 인용법과 다를바가 없어 보입니다.

반박할게 있으면 반박하시고 자료를 제시해주십시요. 저도 다 반박할 자료는 있으니까요.

원 래 단순하게 몇줄 리플로 달려다 글이 길어져서 재미로 보시라고 올린글이지만 솔직히 저런 자세는 기분이 상당히 나쁘네요. 만일 여기가 역사게시판등이었다면 저도 제대로 된 글을 조목조목 논거까지 들어서 올렸을겁니다. 지금 회사이고 간단히 잠시 쉬려고하다 단순하게 리플달려던 글이라 논거까지 찾아서 올리지 않았다고 무조건적으로 저를 거짓말장처럼 몰아가시는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화가 나고 기분이 나쁘군요.
2004-03-19
18:25:06
220.126.125.193



개떵이
흠 진실처럼 안 비춰지는 이유가
제가 알기로는 고려는 외교로서 항복한다고 하고
몽골군이 돌아가면 다시 투항하고..
그런걸로 알고 있어서요.
또한 그 당시에 몽고군과 싸운건 군대가 아니라 민초 아니엿던가요?
또한 강화도로 수도를 천도해서 잡지 못했을 뿐이지, 국토는 전부 유린 당하지 않았던가요
2004-03-19
18:28:48
211.201.39.74



개떵이
그리고 대부분의 말은 근거에 입각해서 말씀 하셧지만
여경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거는
고려가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될 스스로의 기회..
그 전후 부분에서 글쓴이의 주관적인 사고가 강하게 느껴져요.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주관적인 느낌을 준다랄까나요...
2004-03-19
18:31:17
211.201.39.74



김승규
개떵이님//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고려의 기록을 보면 고려정권은 공식적으로 외교로서 항복한뒤 물러가면 다시 투쟁하고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물론 서로 협상등을 하면서 그런 비슷한 늬앙스를 품긴적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거야 외교협상과정에서 늘 있는 과정이니까요. 그런예야 거란의 1차 침입때 서희장군도 있지않습니까? 가까이는 조선시대때 뭔일만 터지면 조선왕이 직접와서 해명하라는 명,청의 황제들도 있습니다만 실제 본인들도 조선왕이 실제로 올꺼라고 믿지도 않았고 조선왕도 병을 핑계등으로 가지않고 왕자나 사신단을 보내고 하지않았습니까? 그런 외교적인 수사였을뿐 7차 침공까지 공식적으로 항복한적은 없습니다.

하 지만 공식적인 기록에도 그런 기록은 없고 또한 당시 실질적인 고려의 국왕이었던 최씨정권은 오히려 대몽투쟁을 더욱 독려했습니다. 즉,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면서까지 불사투쟁항전을 국민들에게 보여주었고 민중들에게는 산성과 해도로 입보(立保)케 하는 정책을 지시하며 대몽항쟁 의지를 불태웠습니다.그리고 당시 최씨정권을 무너뜨렸던 무신 김준이 교정별감에 스스로 올라왔음에도 몽골과의 강화를 끝끝내 반대하였고 다시 김준을 살해하고 교정별감에 오른 임연은 한술 더 떨서 친몽정책을 펴려는 원종을 폐하고 왕제 안록공 창을 세웠으나 했었습니다. 임연이 죽은후 그의 아들 임유무도 끝내 반몽항쟁을 굽히지 않았지요.

강화도에서 다시 개경으로 환도한것은 몽골로 도망갔던 국왕이 스스로 다시 정권을 잡기위해서 임유무를 죽이고 환도한것일뿐 대몽항쟁 초기부터 환도까지 고려정부는 끝끝내 대몽항쟁 의지를 불태우고 각지의 군사들과 백성들을 독려했습니다.

그 리고 말씀하신대로 민초들이 40여년간 수탈을 당한것도 사실입니다. 국토가 유린당한것도 사실입니다만 당시 민초들은 몽골의 수탈등때문에 대몽항쟁을 벌였다는 의견이 대부분입니다. 즉, 우리나라 일제 식민지같은 상황을 겪게되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던것이지 군대가 없어서 싸우지 않은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2군 6위의 기존 병제의 병력중에서 선발된 삼별초가 거의 괴멸되다시피한 정규군의 역활을 하면서 백성들과도 연계해서 싸운것입니다. 민초들의 대몽항쟁은 의병들이었다고 해도 정규군이 없었던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7차에 이르는 몽골의 침입들에는 정규군의 몽골격퇴기록들도 있습니다. 민초들이야 당연히 기록에도 별다르게 남아있지않구요.

그리고 고려의 윤관장군의 동북9성정벌에 대한 것은 물론 글은 제 아쉬움이 들어가있기는 합니다만 당시 주변상황등은 모두 기록에 근거하여 썼음을 알려드립니다. 어떠어떠한 부분이 주관적인 사고라고 말씀해주시면 근거등을 올려드릴수도 있습니다.

주관적인 느낌이라는것은 단지 그때 그런 기회가 있었음에도 아쉬움이 있었다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록에 근거한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주관적인 느낌을 준것은 다만 제 표현력이 떨어지기 때문일것입니다. 죄송합니다.
2004-03-19
19:01:07
220.126.125.193



개떵이
네. 그렇군요.2004-03-19
19:17:05
211.201.3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