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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긁적이기

무제-0004

by 시간의지배자 2007. 10. 19.
1992년 11월 20일날 역시 코텔 글나래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약간은 개인적인 경험과 약간은 친구의 이야기를 버무린 것입니다. 아쉽게도 제일 마음에 들어했던 무제-0002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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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무제-0004
쓴사람:김승규
버전:0.1

11월의 나의 꽃다발은 우울함만이 기억난다. 그날도 그랬다. 매몰차게 몰아치던 바람, 약간씩 흩날리던 눈과 우중충한 날씨때문만은 아니다.

"후후,어린아이같아."
"어린아이같다고? 무엇이 말이야?"

L은 약간 미안한듯한---그렇지만 당당히---얼굴로 약간 고개를 꺄우뚱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그런 뜻은 아니고...단지 이런 장미 꽃다발은 정말 오래간만이거든. 예전 누군가에게 한번 받아본 이후로는 처음이니까. 나의 생일을 챙겨주기 에는 식구들은 너무 바빴지."

오! 저런.이제 L은 그 사고이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지독한 자동차사고에서 자신만이 살아남은 것을 그토록 자책하던 그녀가... 나는 은근히 그녀의 시선을 돌려보고자 했다.

"남자친구가 안겨주었었나 보지?"

나는 커피잔에 입술을 대고는 물었다.
장미 한 송이마다 은근한 향기를 기대하며 음미하던 그녀가 눈을 살포시 뜨고는 말했다.

"맞아.잘 아네.그는 잘 생긴 고등학생이었는데 내게 사랑을 고백할것 같은 분위기였지."

나는 안다.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녀의 로미오는 없었을거야. 하지만 진짜였다면?

L은 은근한 눈빛으로 나의 다음 행동을 고대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무엇 을 기대하고 있을까? 은근한 나의 질투를 고대하고 있나? 아니면 나의 담담한 마음을 기대하고 있나?

"그래? 그 행복한 로미오는 지금 어디있나?"

나의 물음은 적당했을까?

"응.그는 지금쯤 군복무중일거야. 혹시 모르지. 대학원서 논문준비로 뛰어다 니고 있을지도."

그녀는 내가 자신에게 준 생일 선물에는 큰 뜻을 두고 있지 않은 듯 했다. 다만 꽃다발은 너무 좋아했다. 어린아이같다고 하면서도 적당히 그 꽃다발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나는 2년전 그녀의 어머니와 남동생이 고속도로의 3중충돌로 이 세상을 뜨게 된것이 생각났다. 그 후 눅눅하게 그녀에게 배어버린 자책어린 곰팡이는 이로써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그녀나 나나 힘든 수술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도 그 꽃다발에 어떤 의미가 있어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었다.

"이만 나가자.너희 아버님이 걱정하시겠다."

L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같이 일어서고 있었다.

겨울어린 공기는 바람이라는 촉매로 인해 더욱 광폭했다. 서울거리의 도심이지만 이런 추위는 거칠것이 없다고 말하는 듯 했다. 우리는 얼른 지하도로 들어가 버렸다. 나의 3호선과 그녀의 4호선의 교차점.

그녀의 4호선이 앞으로 다가왔을때 L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할말이 있는데..."

나는 의문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의 모습을 보고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아니.아니야.나중에 말하지.뭐."

문이 닫혀지기 직전 그녀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나에게 잠깐 동안의 손을 흔들어주고는 얼른 자리에 앉아버렸다. 계집애가...또 돌아보지도 않네. 투덜대고는 나의 3호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L의 교통사고 소식을 접한것은 다음 날이었다.현장에서의 즉사였다고 한다. 음주운전자의 희생물이 되었다. 꽃다발을 꼬옥 쥐고 얌전하게 이 세상을 떴다고 했다.

12월 초,나는 L의 엽서를 받았다.그녀의 엽서가 왜 이제서야 도착했는지는 알수가 없었다.

---이 엽서.너랑 헤어지고 지하철에서 쓴다.
오늘의 꽃다발.정말 고마워.내 마음 알지?
나의 로미오는 없어.너의 마음을 떠 본것 뿐이야.
지난 2년간의 상심을 너그럽게 돌봐준 너가 고마워.
다음주.토요일 겨울바다 가자!

-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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