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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긁적이기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에 대한 반박 - 1편

by 시간의지배자 2007. 10. 19.
작년에 어느 사이트에 올라온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라는 글을 반박한 글입니다. 이상하게 한번에 안올라가서 4편에 나눠 올립니다.(너무 긴가..-_-;;)

솔직히 당시에는 황당한 마음에 직장에서 눈치봐가며 글을 올린거라 오타 투성이에 기억에만 의지한체 쓴 글이라 근거자료도 빈약한 것들도 있습니다. 언젠가 날 잡아 확실하게 근거자료 준비해서 수정하고 싶지만.... 귀찮아서..-_-;;

우선 예전 쓴 글만 올려봅니다. 시간되면 수정본을 올릴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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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들은 2006년 4월 11일에 내 이글루스 블로그에 올렸던 글이다. 티스토리에서는 어쩌면 글을 하나로 올려도 될지모르지만 그냥 귀찮아서 예전 그대로 옮기려고 한다. 이 글을 쓸 당시 내 블로그의 하루 방문객은 겨우 50~60명수준이었으나 이 1~4편을 쓴후 하루최대 1300 hit라는 나로서는 상상할수도 없는 방문객을 맞은적도 있다.

원인을 살펴보니 당시 네이버 정문에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라는 글이 올라온 것이 문제였는데 때문에 이글에 대한 반박문을 쓴 초록불님과 나에게 방문객이 집중되었던 탓이었다. 그래도 난 워낙 알려지지 않은 블로그라 그정도에 그쳤지 초록불님은 일명 환빠들에게 큰 곤욕을 치뤘었다. 역시 유명하면 피곤하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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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게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도 우리나라가 역사상 모두 대륙에 있었다(심지어 조선시대 후기까지 대륙에 있었데요..에구) 라고 주장하시는 분이 쓴거 같네요. 식민사학자들의 역사왜곡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분들의 역사왜곡도 일본애들과 별반 다를게 없어보이더군요.

시간이 조금 남아 한번 반박해봤습니다. 그냥 직장이라 참고 자료등을 찾을수없이 기억력에 의존한것들도 있어 조금 틀릴수는 있습니다. 근데...하다보니 존댓말, 반말, 비꼬는 말... 다 섞어버렸네요. 정리를 해야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재미로 보세요...쩝... 무지 깁니다...


한국사 미스테리 60가지에 대한 반박


1. 19C 독일인 '에른스트 폰 헤쎄 - 봐르테크'와 영국인 '존 로스'는 현재 중국영토인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였다.

===> 인터넷에 이 말이 떠돌고 있은지 몇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근거자료가 없습니다.


2. 중국의 '중국 고금 지명 사전' 마저도 '하북성'이 근대 조선의 강역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

===> 중국 고금 지명 사전을 뒤져봤지만 이런 구절 없습니다.


3. 몽고가 좋은 말을 얻기위해 제주도까지 와서 말을 사육했다는 것은 다시 되새김질해보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 몽고가 제주도에 말을 사육한것은 삼별초 제압이후 제주도에 남아있을 제주도의 삼별초 잔존세력 억압을 합법적으로 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하기 위함이었으며(당시에 군마는 현재의 탱크와 비슷한 개념이므로...) 그 이후는 몽골의 일본 원정군의 군마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4. 삼국지의 위,촉,오 가 병력을 모두 합해도 실제로는 20만명 안팎이었다. 고구려나 백제의 전성기 병력은 100만명이었다.

===> 위촉오의 병력이 20만명 안팎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없습니다. 이런 사료도 없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 병력이 100만명이라는 사료도 공식적으로 없습니다. 공식적인 기록(구당서)에는 백제의 호구수가 76만호로 가장 많지만 이것조차도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대세이며 또한 인구 호구수도 76만호, 전주에서 발견된 신라가 말한 금석문에는 백제 멸망당시 호구수가 24만호라는 등 여러 주장이 있습니다. 설사 76만호라 하고 고대 호구통계상으로 계산해 620~700만명의 인구수라고 한다고 해도(이 주장대로라면 삼국의 일국일뿐인 백제 인구만해도 수백년후의 고려전체인구보다 많습니다.) 100만명의 군병력은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현재 남한 인구가 4400만 정도인데 군사수는 60만에 불과할뿐입니다. 이것조차도 주변국의 인구수 병력비율에 비하면 엄청나게 과한 상태입니다.(북한의 170만 군병력때문이죠..) 그런데 당시 백제의 군제상(당시 백제는 귀족들의 사병들의 집합체에 가까운 군대였습니다. 귀족들의 사병으로 오히려 현재의 모병제와 비슷했습니다.) 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아이빼고 여자빼고 노인빼고 하다보면 인구의 대부분이 군인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줘 백제의 인구가 600만명이상이라고 해도 생산활동을 할 남자가 전무한 국가가 고금에 있었다는 소리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한번에 동원한 최대의 군사력은 채 5만명정도에 불과하며 군사학적으로 추정하면 멸망당시 최대치로 잡아도 15만이 채 되지 못합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풍전등화의 상태에서 이것저것 다 끌어모아 동원한게 겨우 계백의 5천결사대였습니다.(이것마저도 귀족들을 닥달해서 겨우 얻어낸겁니다.) 모르겠습니다. 당시 백제 인구가 한 2,500~3,000만명 된다면 100만 군사가 가능할지도... 더더군다나 백제보다도 인구사가 적다는 고구려가 100만의 군사라... 군사학자나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고구려 전성시기인 광개토대왕의 시절에도 군사력은 30만이 되지않았을꺼라는 게 정설입니다. 30만의 군사가 적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징기스칸이 세계를 제패할때 모두 동원한 군사력이 겨우 15만명정도입니다. 그걸로 전세계를 정복했지요. 더더군다나 듣기로는 그중에서 정예병력은 2~3만의 기마군에 불과했다고 하더군요. 군사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정예병이냐 아니냐가 중요할뿐입니다.

더더군다나 전국을 평정하고 고구려에 침공했던 수나라 침공때 군사가 133만명이라고 알려져있지만 이는 단지 싸우는 군대의 수이고 물자보급병등까지 합하면 250만명이 넘는 병력이 고구려를 침공했었습니다. 이로 미루어볼때 위촉오의 군사수가 20만도 되지 못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습니다.(원래 난세일때가 군사수가 더 많습니다. 그 근거로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할때 병력만도 100만이 넘습니다. 그걸 기반으로 고구려를 침공한거였죠.)


5. 같은 해의 같은 달에 백제에선 가뭄이 들고 신라에선 홍수가 난다.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이는 기상대 자료만 꼼꼼하게 따져봐도 당장 거짓임을 알수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15~20년정도를 주기로 이런 현상이 한반도내(더더군다나 남한만 따져도!!!)에서도 일어납니다. 몇년전 경상도쪽에서는 갑작스런 집중호우로 물난리가 나서 사람과 가축이 떠내려가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같은날 충청도와 전라도쪽은 가뭄으로 논이 갈라지는 장면등이 뉴스에서 엄청나게 나왔습니다.


6. 삼국시대를 비롯해 고려, 조선 시대에 이동성 메뚜기떼에 의해 입은 피해기록이 무수히 나온다. 한반도에는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할 수 없다.

===> 이것도 허구자료입니다. 곤충학자에 의하면 지금도 한반도내에 이동성 메뚜기가 존재하고 몇년에 한번씩정도 일부지역에 소수가 나타나곤 합니다. 다만 지금은 조선말이후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현대화로 인한 생태계의 변화로 이동성 메뚜기등이 거의 사라졌을 뿐입니다.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조선중기이후 실록등에서 메뚜기 피해가 급격히 사라져가는 것이 그 증거이기도 합니다.


7.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 왕의 명령으로 씌여진 '만주원류고' 라는 역사서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 제멋대로 해석한 것으로 비슷한 문장은 있지만 이런 기록은 없습니다. 한문학의 이해부족이랄까...


8.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 각종 지리지나 고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종합하여 보면 한반도에서 찾을 수 있는 지명보다 찾을 수 없는 지명이 더 많다. 각종 문헌에서 나오는 모든 지명이 현재 중국에는 있다.

===> 이는 하북성이나 산동성 또는 현 중국의 일부 해안가쪽에서는 일부 이런 지명이 있는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요서와 산동, 하북성을 아우런 일이 사실인만큼 그때의 영향이 아닐까합니다. 다만 옛 문서에 나오는 지명등이 중국에는 남아있는데 한반도에는 없다는것은 억지입니다. 이는 백제나 웅진, 곰마루는 말이 일본의 어느 지역에서 남아있다고 그곳이 백제의 수도인 웅진이라거나 사비공주라고 우기는 것과 똑같은 주장입니다. 이는 백제계 유민이 일본의 건너가 고향등과 비슷한 지형을 가진 것을 보고 이름을 붙였을뿐 그곳이 웅진이나 사비성이 아님과 같습니다.

다만 중국에 남아있는 지명등이 고구려나 백제가 영유했던 땅의 흔적으로 일부 그런 지명이 남아있을수도 있고 우리는 고려이후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소중화사상때문에 고려에서 불러오던 우리의 전통사상을 대신하기 위해 사대부들이 옛 지명을 파괴하고 엄청나게 많은 지명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우리말로 되어있던 지명등이 한자로 표기되며 변화하며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또 큰 이유중 하나는 일제 침략기이후 지명의 파괴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이 100년전만 해도 완전히 다른 경우가 일제가 남긴 이미 발견된 사료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더구나나 이는 밝혀진 소수일뿐 일제의 측량과 국토정비 사업시 얼마나 많은 지명이 변한것이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상당수를 변화시킨 기록만 있을뿐....



9. 김부식은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김부식도 모르는 지명이 아무 근거없이 현재 청천강이라고 알려져있다.

===> 김부식이 살수가 어디인지 모른다고 한 사료가 없습니다. 어떤 문구인지는 알겠으나 이는 미숙한 한자번역의 오류로 짐작됩니다. 다만 살수가 청천강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반대합니다. 이 학설이 지금과 같이 굳어진 것은 일제의 식민사학이후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살수가 어느 곳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10. 현재 내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성터가 발굴되었다.

===> 이는 사실입니다. 2~3년전 국내학자들이 몽골로 고구려 성터를 확인하기 위해 내몽골 지역으로 가서 고구려전통의 성곽 축성기법과 일부 고구려 유물을 확인하였습니다. 다만 단지 땅위로 들어난 것만 확인했을뿐 구체적인 유물발굴등은 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몽골과 더 긴밀하게 협조한다면 자세한 유물조사가 가능하겠지만 실상 정부나 학계에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하는 눈치입니다. 이 고구려 성터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 고구려의 영토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영토보다 배 가까이는 커지게 됩니다. 더군다나 만주뿐이 아닌 몽골지역의 초원도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어 당시 실크로드의 하나인 '초원의 길'이 고구려의 영향력아래 있었는지를 밝힌수도 있는 유물들임에도 강단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깨질까봐 나서지 않고 있고 정부는 일부러 나설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그이후 연구는 답보상태로 알고 있습니다.(당시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이를 방영한적도 있습니다.)


11.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은 생긴것부터 풍속이나 문화까지 한국인과 소름끼치도록 닮아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고구려칸이라고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

===> 이도 허구입니다.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족들이 풍속이나 문화, 생김새등이 우리와 상당히 닮은것이 사실입니다. 언어학적으로도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를 고구려 칸이라는 불리는 동명성왕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허구입니다. '칸'또는 '한'이라 불리는 어떤 영웅에 그들이 존경의 염을 품고 있는 것은 있지만 그게 동명성왕으로 연결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명칭도 다른데 말이죠.. 수많은 가설의 주인공 후보들중 하나의 학설이 동명성왕이 아닐까하는 추측일뿐입니다. 거기다가 고구려칸이라니...그런 명칭은 없습니다. 오히려 동명성왕보다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환웅이라고 말하는 인물이 아닐까하는 주장이 더 정설에 가깝습니다.(흔히 말하는 '칸'에 주인공에 대한 것은 몇년전 국내방송사의 다큐멘터리나 BBC, 디스커버리등의 다큐에서도 다룬적이 있습니다. 다만 해외 다큐에서는 소개에 불과하지만 국내의 학계에서는 그 인물이 어떻게든 동이족의 한 분류가 아닐까하는 추측은 있습니다.)

그리고 징기스칸등에서 말하는 '칸'은... 동아시아 초원에 널리퍼진 '칸', '한','단'등 지배자의 명칭의 유사성등으로 더욱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기는 합니다.


12. 치우천황에 대해 중국에서는 고리국 황제이며 묘족의 선조이고 동이민족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한단고기등의 사서를 보면 치우천황은 분명히 한민족의 선조이다. 묘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다. 바이칼 호수 주변엔 고리족이 지금도 살고 있으며 고구려 고려 등이 모두 고리 족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치우를 부정한다.

===> 치우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고리의 수괴이며 묘족의 선조로 여긴다는 것은 맞습니다. 다만 그게 동이족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인 상고사에 대한 중국의 해석으로는 동이족은 묘족의 3분파중 하나로 여길뿐입니다. 즉, 남쪽의 묘족은 현재의 장족이며 서쪽의 묘족은 티벳족의 조상으로 또 하나의 동북쪽의 묘족은 동이족이라는 식입니다. 묘족 = 동이족이 아니라 동이족+장족+티벳족 = 묘족이라는 식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사학을 배운 현재의 강단사학자들만 치우를 부정할뿐 국내에서 치우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조선시대등에도 우리의 민간풍습에 치우는 뿌리깊이 스며들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즉, 역사적 기록이 아닌 풍습으로 남아있는 것이지요.

중국의 입장도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치우가 동이족이나 또한 미개한 족속의 수장등으로 표현하며 한족과 완전히 다르게 엄격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치우를 부정하는 것은 국내가 아닌 일부 강단 사학자들 뿐입니다.(최근은 강단사학자들 중에서도 치우를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13. 백제의 유명 8대 성씨는 한반도에는 남아있지 않다. 모두 현 중국대륙에 있다.

===> 백제의 8대성씨등에서 말하는 풍씨등이 현재 중국에 있는 풍씨등과 어떤 인척관계인지는 알수없습니다. 중국에도 김씨 성이 있지만 혈연적으로는 한반도계와 완전히 다른 김씨인것 처럼 말입니다. 또한 관계가 있다하더라도 지금 진씨성의 중국성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있지만 천수백년전에 귀화한것처럼 그들도 그런 관계일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씨는 신라와 합병되며 백제의 성씨는 일부러 숨겨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백제의 8대 성씨는 백제귀족으로 신라입장에서는 처결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백제의 성씨를 버리고 어쩔수없이 신라의 성씨를 받아들이거나(고려 왕족인 왕씨가 옥씨로 변하거나 발해왕가의 대씨가 태씨가 되어버렸듯이) 목숨을 구하기위해 성을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하다못해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한후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정체를 버리기 위해 성과 이름을 바꿔버려 지금도 그분들의 정확한 성과 이름을 모르는 독립유공자도 많습니다.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현대가 이럴할진데 당시 나라가 망하고 수백년간 성씨를 숨겨야했던 백제 귀족들이 본성을 잃어버린 것은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백제 멸망후 당시 일본 기록의 의하면 백제의 8대 성씨는 오히려 일본에 다 나타납니다. 그후 일본의 지배층으로 편입되면서 그들의 성씨가 대부분 바뀌어버립니다만... 명치유신 이전까지만 해도 끈질기게 한반도계 성씨를 유지하던 가문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명치유신 이후 하나의 일본이라는 모토아래 핍박을 위해 다들 바꾸어 버렸다고 하던데...


14. 박혁거세의 무덤은 중국에서 발굴되었다.

===> 이런 기록이나 무덤도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박혁거세는 승천하였으나 뼈가 다섯번이나 하늘에서 떨어져서 하나로 합치려고 했으나 구렁이가 방해를 하여 어쩔수없이 무덤을 다섯군데에 만들었다는 기록만이 있을뿐입니다. 박혁거세의 무덤은 발견되지 못했습니다.

다만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알려신 동신성모의 무덤이 중국 절강성에 있다라는 말이 와전된것으로 압니다이는 삼국사기의 저자로 알려진 김부식이 송나라에 외교사절로 갔을때 왕보라는 중국인이 '중국 선도산의 동신성모는 고려의 신인데 아느냐?'라고 물었는데 김부식이 동신성모가 누군지 모른다고 답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철저한 신라계 중심주의자였던 김부식마저 박혁거세의 모친이 동신성모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이는 박혁거세의 모친이 동신성모라는 주장이 후예 첨가되었거나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정화연간(1111~1117년 사이)에 송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식이 모른다고 했던 동신성모상이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의 고려도경에 보면 동신성모상이 고려의 동신성모지당에 모셔져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어쩌면 송에 다녀왔던 김부식이 중국에서 신으로 모신다는 동신성모을 신라계 인물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박혁거세의 모친으로 날조를 하기위해 모셨거나 아니면 박혁거세의 모친이었다는 것을 몰랐다가 신라계 인물들의 단합을 위해 모셨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동신성모의 무덤이 절강성에 있다고 하지만 그게 반드시 박혁거세의 모친이라거나 하는 기록이나 유물은 없고 설사 동신성모가 박혁거세의 모친이라고 해도 그 무덤이 반드시 동신성모의 무덤이라는 증거도 없습니다. 이는 중국인들 특유의 실제 무덤이 아니라고 해도 가묘와 사당을 만들어 숭배하는 수일수도 있고 또 실제로 박혁거세의 일부 후손이 선조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 발전이 되었을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로 인해 박혁거세의 무덤이 중국에서 발굴이 되었다거니 하는 주장은 터무니 없습니다.


15. 고려, 조선등의 무역 내역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수출하고 있다.

===> 이는 도대체 어떤 물품을 말하는지 알고 싶군요. 단순하게 한반도에서 생산할수 없는 것을 수출할수 있다니... 또한 그렇다고 해도 고려와 조선은 당시 중국의 통일왕조를 제외하고는 동북아의 주인이었습니다. 때때로 반란을 일으키고는 했지만 여진족은 전통적으로 고려이래 고려와 조선의 속민이었고 하다못해 고려, 조선과 3대 우호국이었던 유구왕국조차 조선의 왕을 명의 황제와 동격으로 대했다는 기록등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일본도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영향력을 어느정도 인정하고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남기지 않지만 은근하게 상국대접을 하던 상태입니다.

이런 고려와 조선이 명등과 조공무역을 했듯이 이들 연해주, 만주, 일본, 유구왕국등에게서 조공무역과 유사한 형태로 물물을 교환하고 이 물물을 또 명제국등과 조공무역이나 사시무역의 형태로 수출했었던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설사 고려나 조선에서 생산할수 없는 물품도 수출할수 있었던 내용이 설명가능합니다.